스위스 시계 수출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물량은 작년 대비 두 자리수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다. 하향 곡선을 그리는 모습이 앞으로의 시계 산업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증을 유발하게 한다. 1990년대 이후 부활한 기계식 시계는 2000년에 들어 가시화, 특히 고급 시계 시장은 2010년을 기점으로 큰 폭으로 성장했다. 그런 배경에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의 고객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우선 선두에 섰던 중국 시장이 정책 문제로 주춤하고 있고 나머지 시장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시계시장의 주춤세는 일단은 중국과 일본 등의 관광객 구입 감소, 최근 원화의 가치 상승, 그리고 시계 애호가들의 노령화(이미 가질만큼 가져봤고 더 이상 고가의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없어지는 무소유를 추구하는 연령대로 진입), 그리고 기계식 시계에 대한 필요성이 여전히 부족한 중장년층, 오히려 기계식 시계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높은 편이나 구입할 자금이 부족한 청년층의 증가로 볼 수 있을까.
한국에서 현재 잘 되는 아이템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유통 시장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는 백화점의 매장 구성에서 짐작할 수 있다. 잘 안된다 싶으면 많은 돈을 인테리어에 퍼부었든 과감히 사라지고 새로운 매장이 터를 잡는데 일련의 개편 작업에서 살아남거나 신규로 들어오는 브랜드들을 보면 나름의 상황이 어떤 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시계에 대한 기대감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브랜드의 교체는 있을지언정 시계라는 아이템은 여전히 백화점 코너의 2~3층에 크게 자리잡고 있으니까 말이다.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 신관 3층은 본관 지하처럼 시계 브랜드가 포진한 곳이다. 이곳도 몇 번의 개편 끝에 브랜드의 위치는 제법 바뀌었지만 여전히 시계 브랜드를 쾌적하게 만날 수 있고 최근 브레게도 이 공간에 합류했다. 크고 긴 곡면 파사드가 인상적인 부티크를 살펴보면 벽면은 기요셰 장식으로, 아일랜드 쇼케이스가 놓인 카펫은 레인드네이플을 떠올리게 만드는 타원형 카펫이 깔려 있다. 편안하게 브레게에 관한 책과 시계를 감상하고 구매할 수 있는 VIP 라운지도 따로 마련돼 있다.
오픈 기념으로 ‘브레게, 혁신가(Breguet, the Innovator)’란 제목으로 작은 전시 공간을 마련해 국내에서 쉽게 보기 힘든 더블 투르비용, 미닛 리피터, 뮤지컬 시계 등 6개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비롯해 12개의 2016년 바젤월드 신제품도 전시했다. 여러 시계 브랜드들이 기계식 무브먼트를 탑재한 여성 시계들을 내놓고 있는데 브레게도 마찬가지. 한국에서도 놀라운 인기를 얻어낸 여성 전용 컬렉션, 레인드네이플 외에 클래식, 트래디션 등에도 보다 다양한 여성 모델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특히 트래디션 담므 7038의 경우 남성 시계로만 이뤄진 트래디션 시계에 처음으로 등장한 여성 시계다.
트래디션 담므 7038
배럴을 가운데 두고 기어 트레인과 이스케이프 휠, 레버, 밸런스 시스템까지 다이얼면에서 그대로 노출시킨 트래디션 스타일을 어떻게 여성 시계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배럴 커버에 꽃잎 모양의 조각, 자개 소재의 오프센터 다이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베젤, 루비를 세팅한 크라운과 강렬한 빨간색 악어 가죽 스트랩으로 표출했다. 이런 기계 장치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며 커플 시계로 착용하는 분이 나타나기를.
클래식 문페이즈 담므 9087/9088
그 외에도 지름 30mm의 작은 케이스에 낭만파들에게 인기 있는 문페이즈를 넣은 클래식 문페이즈 담므 시계에 펄 임페리어 하이 주얼리 시계도 전시됐다. 그간 시계, 특히 기계식 시계는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시계들의 출현은 여러모로 반가운 일이다. 오래된 듯한 옐로 숫자 야광 인덱스에 브라운 다이얼, 가죽 스트랩을 입은 타입 XXI도 브레게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드러내고 있다.
타입 XXI 3817
이번 부티크 오픈의 백미는 스위스 본사에서 인하우스 기요셰 다이얼 장인이 직접 시연을 보여준 것이다. 조각가가 뷰린 등의 조각칼로 직접 음각, 양각의 조각을 하는 것은 치즐링이나 인그레이빙이라 부르고 이렇게 기계 장치에 요철이 있는 블럭을 삽입한 후 이와 그대로 연결된 장치를 통해 다이얼이나 로터 등에 일정한 패턴이 있는 무늬를 내는 것이 기요셰다.
프랑스어, 기요셰guilloche의 사전적인 의미는 노끈을 꼰 모양으로 새겨 넣는 끌이란 의미인데 영어로는 ‘기계로 새겨 넣은 줄무늬’라는 비슷한 의미이긴 하지만 왜 엔진 터닝engine turning이라 부르는지 잘 와닿지 않았던 분들에게 좋은 예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요셰가 도장처럼 찍어내는 스탬핑이 아니라 일일이 사람이 조정해서 깎아 내는 것이라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것도 알려주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몇 개 남지 않은 100년 넘은 이 장비를 스위스에서 한국까지 가지고 온 것이 대단하다. 실제로 설치도 쉽지 않았다고. 이렇게 힘들게 가져올만큼 브레게가 각별한 애정을 보이는 이유는 기요셰 패턴 장식을 넣은 골드 다이얼을 고안한 사람이 바로 브레게의 창립자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가장 많고, 다양한 기요셰 패턴을 가진 시계라면 브레게에서 찾을 수 있다.
다듬고 조이고 새로 기름칠하며 잘 관리한 장비에는 이제 고배율 현미경을 부착해서 더 정교한 작업이 가능해졌다. 최근 레이저, 3D 프린터등 신기술을 적용한 장비들로 보다 색다른 작업이 가능해졌지만 이러한 손과 기계가 함께 만들어 내는, 정교하지만 어딘가 손맛이 살아 있는 것의 아름다움은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고 니콜라스 G.하이에크 회장의 작고 후 현재 브레게의 대표는 손자인 마크 하이에크가 맡았고 그 후 행보는 다소 다른 분위기이지만 여전히 브레게는 스와치 그룹에서 가장 고귀한(prestige) 군에 속하는 대표적인 시계 브랜드다. 전통적인 시계 시장의 미래는 점점 한 치 앞을 모르겠다는 는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겠지만 브레게는 살아 남을 것이고 살아 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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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s © Breguet Korea & Manual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