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8년에 창간된 일간신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1900년부터는 외신을 게재하기 시작했는데 영국 로이터통신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외신을 공급받았다고 나와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강제로 <한성신문>으로 발행되다 그해 9월 14일 문을 닫은 민족지로 손꼽힌다. <독립신문> 이후 한글 표기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항성신문에는 여전히 한문이 더 많은듯하다.
1908년 1월 25일 황성신문 1면 4단 정치사회면에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렸다.
淸帝와 金時計
故英國빅도리 女皇께셔 淸帝께 贈呈한 金時計는 價額이 一萬二千元이라더라
청제와 금시계
고영국 빅토리아 여왕께서 청황제에게 증정한 금시계는 가액(물품의 가치)이 이만이천원이라더라.
소소한 외신이긴 한데 사실 1908년이면 시기가 맞지 않는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이미 작고한 뒤고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 7세(1841~1910)가 영국, 아일랜드, 인도 연합국의 왕으로 재직하던 시대다. 19세기 중반 중국은 제1,2차 아편전쟁을 격은 후 서방에 사업과 항구 통제권을 부여하는 조약에 서명을 했고 제1차 중일전쟁을 치른 후 대만을 일본에 넘긴 후였다. 이런 때에 이 소식을 굳이 조선땅에 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로이터 통신에서 받은 소식 정도일까.
1895년 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직을 맡기로 하며 받은 돈이 월 300원, 신문 가격이 1전이다. 1913년 경성유치원 보육비가 월 2원 50전. 여러 물가를 찾아봤는데 대략 국채보상운동 당시 1원을 4만 원으로 보는 의견도 있고, 1927년 1원을 3~6만 원 정도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
그 기준으로 삼으면 22,000원의 시계가격은 대략 6~12억 원 수준이니 당시로도 굉장한 가격이다.
Text © Manual7